
서론: 루머 하나가 세계를 뒤흔든 이유
최근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 불확실성의 그림자를 드리운 ‘조용한 소문’이 있습니다. 일본이 핵심 반도체 소재인 포토레지스트의 대중국 수출을 사실상 중단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루머였죠. 이 소식 하나로 중국 증시는 크게 요동쳤고, 관련주는 공포와 기대가 뒤섞인 혼돈 속에서 급등락을 반복했습니다. 왜 단순한 루머가 세계 2위 경제 대국을 이토록 흔들었을까요? 그 이유는 이 소문이 바로 ‘미중 기술 패권 전쟁’의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름조차 생소한 화학 소재, ‘포토레지스트’가 있습니다. 이 작은 물질 하나가 어떻게 21세기 기술 패권의 향방을 가를 전략적 무기가 되었는지, 그 숨겨진 이야기를 지금부터 파헤쳐 보겠습니다.

포토레지스트, 반도체 생산의 ‘신의 한 수’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빛으로 회로를 새기는, 마치 사진 인화 시 감광액과 같은 역할을 하는 핵심 소재입니다. 웨이퍼 위에 얇게 바른 포토레지스트가 빛에 반응하여 회로 밑그림을 형성하고, 이 과정을 수백 번 반복하여 반도체가 완성됩니다. 그런데 왜 이 물질이 ‘신의 한 수’로 불릴까요? 숫자가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일본은 전 세계 포토레지스트 시장의 약 70%를 장악한 절대 강자이며, 특히 7나노 이하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EUV용 포토레지스트’ 시장에서는 무려 95% 이상의 점유율을 자랑합니다. 이는 사실상 일본 없이는 그 누구도 최첨단 반도체를 만들 수 없다는 뜻이며, 수백조 원짜리 반도체 공장도 이 소재 없이는 텅 빈 건물에 불과하게 됩니다. 결국, 포토레지스트는 단순한 화학 소재가 아닌, 중국 반도체 산업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전략적 무기가 된 것입니다.

중국 반도체 굴기, 위기 앞에서 펼쳐진 ‘두 가지 전략’
일본의 포토레지스트 수출 통제가 현실화된다면, 중국 최대 파운드리 SMIC와 메모리 기업 CXMT 등은 생산 차질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포토레지스트는 유통기한이 짧아 장기 비축이 불가능하며, 검증되지 않은 소재 사용 시 수율 급락이라는 치명적인 손실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중국은 반도체 굴기를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두 가지 거대한 전략으로 반격에 나섰습니다. 첫째는 ‘돈’입니다. 중국 정부는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대기금’을 조성, 약 130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본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이는 자국 기업들의 연구 개발과 생산 시설 확충에 집중 투입됩니다. 둘째는 ‘선택과 집중’입니다. 당장 따라잡기 어려운 최첨단 EUV 분야 대신, 자동차·가전 등에 사용되는 KRF, ARF 등 ‘범용 포토레지스트’ 시장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최첨단 칩 생산에 차질을 빚더라도, 중장기적으로는 거대한 범용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고, 이를 발판 삼아 최첨단 분야까지 넘보겠다는 무서운 전략입니다.

한국의 위기 극복: 2019년 소부장 독립의 교훈
그런데 중국의 위기가 마냥 남 일 같지 않은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한국입니다. 2019년, 일본은 반도체 핵심 소재 3종(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불화폴리이미드)에 대한 한국 수출 규제를 단행했고, 당시 우리는 ‘반도체 대란’이라는 위기 앞에서 속수무책인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혹독한 경험은 역설적으로 한국 반도체 생태계를 훨씬 더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정부와 기업들은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국산화와 공급망 다변화에 사활을 걸었고, 동진쎄미켐과 같은 국내 기업들이 EUV용 포토레지스트 국산화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세계 1위 포토레지스트 기업 도쿄오카공업 등 일본 핵심 소부장 기업들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라는 거대한 고객을 잃지 않기 위해 오히려 한국에 생산 공장을 건설하며 ‘인 사이드 아웃(In-Side Out)’ 전략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국내 기업의 국산화 성공과 더불어 일본 최고 기업들의 생산 거점까지 확보하며, 그 어떤 외부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포토레지스트 공급망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글로벌 질서 속, 한국 반도체의 생존 전략
이번 포토레지스트 사태는 단순한 통상 마찰이 아닌,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법(CHIPS Act)’이라는 거대한 설계도의 일부입니다. 미국은 네덜란드(ASML 장비)와 일본(포토레지스트 등 핵심 소재)과의 삼각 편대를 통해 중국 반도체 굴기의 숨통을 조이고, 자국 중심의 새로운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친 지정학적 파도 속에서 한국 반도체는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할까요? 첫째, HBM과 같은 ‘초격차 기술’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압도적 우위를 구축해야 합니다. AI 혁명의 핵심인 HBM 시장의 90% 이상을 한국 기업이 장악하듯, 기술 그 자체가 가장 강력한 외교 카드가 됩니다. 둘째, 특정 진영에 편중되지 않는 ‘중립적 공급망 허브’로서의 역할을 강화해야 합니다. 최고 품질의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바탕으로, 모두가 한국을 필요로 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2019년의 교훈처럼 끊임없는 ‘소부장 기술 개발 및 공급망 다변화’를 통해 어떠한 외부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제 안보를 확립해야 합니다. 위기는 언제나 새로운 기회를 동반합니다. 한국이 이 거대한 반도체 패권 전쟁을 단순한 생존자가 아닌,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설계자로서 현명하게 헤쳐나가기를 기대합니다.